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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다락방/속마음 구석

[생각일기] 무제

by 홀로Hollo 2020. 4. 25.


상담을 처음 시작할 때 동생과 입 모아 이야기했던 건 ‘부모님이 상담을 받으러 왔으면 좋겠어요. 특히 아빠가요.’라는 말이었다. 선생님은 그런 우리를 보면서 부모님은 오지 않아. 부모님은 변하지 않아. 라고 현실을 보게 해줬고, 그 다음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는 내가 힘이 생겨서 영향을 줄 수 있어야 그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는 거라고 했다. 아직도 나는 힘이 없는데 나에게 사람들이 영향 받고 있음을 느낀다. 친구들이 영향을 받고, 가르쳤던 아이들이 영향을 받고, 남자친구가, 동생이, 엄마가 영향을 조금씩 받고 있다. 내 변화는 마음의 변화뿐인데, 아직 아무것도 실제로 변한 것이 없는데 주변이 아주 조금씩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솔직히 일차적으로 기분이 좋다. 내가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게 똑 떨어져있던 자존감을 고개 들게 하니까. 근데 나는 내 영향의 한계를 안다. 어떻게, 어떻게 현실을 마주 보게 할 수는 있을 거다. 그건 지금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심리를 치료하는 건 무의식을 계속 마주 보고, 인정하고, 앞으로 나갈 수 있도록 끌어줘야 하는데 나는 마주 보는 이후의 단계를 치료사가 되어 책임질 수 없다. 무서운 일이다.

오늘도 가르쳤던 아이들 중 한 명이 연락을 했다. 아니 어젯밤에. 내가 잠들어있던 밤에. ‘선생님 요즘 너무 우울해서 힘들어요. 선생님이 아시는 정신과나 상담소 소개해주실 수 있어요? 금액도 고려해서요.’라고 말하는데 내가 다 알지 못하는 이 아이의 아픔을 다른 곳에 연결하지 않고 직접 손 댈 수 있다면 너무 좋을 텐데, 마음이 아팠다. 지금 내 역할은 딱 여기까지였다. 징검다리. 듣고 공감해주는 것 까지.

항상 눈치를 보고 살았다. 눈치 보기가 일상이었다. 성인이 돼서도 나의 결과물들이나 결과물을 만들어가는 과정 전부를 눈치 보며 살았다. 보살펴지지 못한 내면의 아이가 늘 눈치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면서도 또 깨닫게 된 건 나는 대의적인 인류애가 넘치는 사람인가보다 하는 부분. 눈치를 봐서가 아니라 그냥 왠지 나를 통해 누군가 사랑을 느끼고, ‘나’로 설 수 있다면 그것만큼 행복한 일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깊이 빠져 있는 이 수렁을 어떻게든 빨리 헤쳐 나가고 싶은 이유다. 계속해서 나로 인해 ‘나’를 알게 될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선생님한테 말하면 너나 보세요~ 하실 거 같아서 웃음이 난다. 이전에는 무조건적인 긍정이고 맹목적인 긍정이었지만 이제는 안다. 내가 지옥 같은 현실을 느끼지도 못하면서 남한테 미치는 긍정적인 효과는 나락이다. 너 지옥인줄도 모르지만 그래도 행복해라 하는 못된 주문이다. 이제는 안다. 내가 어떤 지옥에 있는지 알기 때문에 어서 벗어나서 다른 사람이 빠진 지옥을 알아봐주고, 건져내주고, 마주보고 올라올 수 있도록 함께 걸어주는 거, 그게 긍정이고 돕는 힘이다.

긍정은 좋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전까지의 긍정은 억지로 좋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있는 그대로를 보고 싶다. 내 안의 슬픈 것, 아픈 것, 우울한 것, 속상한 것, 상처받은 것, 기쁜 것, 좋은 것, 행복한 것, 무기력한 것, 사랑스러운 것, 감사한 것 그 어떤 것이든 있는 그대로를 보고 싶다.

막연하게 미혼모들을 위한 시설을 만들고 싶었다. 대형 시설이 아니라 정말 갈 곳 없는 아이들이 와서 쉬어갈 곳. 지금은 눈이 조금 돌려졌다. 청소년 여자 아이들을 위한 곳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좋은 걸 좋다고, 싫은 걸 싫다고 말하지 못한 아이들이 내 품에서 쉬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 아주 많이 힘이 생겨야할 것 같다. 더 뚜렷하게 있는 그대로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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